『백경』은 사건이 점화되는 순간부터 서사가 마무리되는 순간까지, 비합리성으로 점철되어있다. 우리의 안정이 얼마나 허무한가. 얼마나 공허하고 불안정한가. 딛고사는 땅마저 판이 움직일 때마다 흔들리고,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돈다. 태양계는 우리 은하에 포함되어있고 그 은하는 오르트 구름에 둘러쌓여 빙빙 돈다. 계속 팽창하는 전 우주적 관점에서 한 인간의 위상은 매 순간 흔들리고 있다. 우리는 태생적으로 불안정한 존재다. 존재를 '안정'이라는 허구속에 넣어 삶을 진행하는 자기기만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제 '데미안'처럼 알을 깨버릴 때가 됐다. 근대적 합리성이 낳은 신화에서 탈출해야 한다.
이 책의 주인공 이스마일도 본능적 이끌림에 따라 포경선 피쿼드 호에 승선한다. 그 배의 선장인 에이허브는 '백경'에게 다리를 잃은 후 평생을 복수심과 분노로 살아왔다. 이스마일과 친분을 맺은 퀴퀘그라는 야만인은 아무것도 모르지만, 순수한 영혼을 지녔다. 그 배의 모든 선원들은 선장의 흥분에 덩달아 가슴을 펌프질하며 백경을 잡으려한다. 피쿼드 호는 백경에 대한 증오로 가득하다.
반면 백경은 무엇인가. 책은 내내 고래에 대해 설명한다. 고래의 생물학적 구조와 그 능력, 그가 저지른 참사를 비롯해 고래를 주제로하는 다양한 설화와 신화까지 소개한다. 책의 내용으로 미루어보아 항해술과 기술이 발전하지 못했던 당시 고래는 선원들에게 돈벌이이자,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고래는 거대하고 막강하다. 그 새총처럼 갈라진 꼬리를 한번휘두르기만 해도 배 옆에 덩그라니 달려있는 보트따위는 두조각 나버리고 만다. 그가 급히 부상하기만해도 노송나무 배 밑편이 갈라지고 부서져 배가 침몰한다.
게다가 '백경'은 무엇인가. 고래 중의 고래, 무수한 포경업자들이 두려워하는 대상이자 작살 몇 개를 꽂고도 유유히 헤엄쳐나가는 바다의 수호자다. 그는 이스마일이 서술하듯, 신이 보낸 사자다. 하나님은 백경을 보내서 자신의 위엄을 보이려 한 것이다. 그 주름살진 이마와 하얀 모습은 가히 '신성'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에이허브는 백경이 신의 사자이며 신이 그 위엄을 보이려 백경을 보냈다는 말에 중지를 쳐든다. 그는 담담한 유언과 함께 백경을 좇는다. 분노와 증오에 휩쌓여 인생 전부를 백경을 죽이는 데 집중한 그는 마침내 백경의 등에 작살을 꽂는다. 하지만 그 표피를 뚫고 들어간 작살의 밧줄에 감겨 에이허브도 심연으로 빠져든다. 중요한 건 에이허브가 죽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모두가 백경으로부터 도망치려는 상황에서 에이허브가 '백경을 잡았다!'는 사실이다. 한 인간의 작은 증오와 분노가 신의 사자의 등에 '작살'을 꽂아버렸다. 이 대목에서 근대적 합리성과 '신'에 대한 비합리성의 도전이 성공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책 이야기-★ > 인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리바이어던』을 읽고 (0) | 2017.10.03 |
---|---|
『부분과 전체』를 읽고 (0) | 2017.09.16 |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를 읽고(스포일러 있음) (0) | 2017.07.31 |
『가면산장 살인사건』을 읽고 (0) | 2017.07.29 |
『순수이성비판』을 읽고 (0) | 2017.07.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