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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인문학

『백경』 근대적 합리성에 대한 비합리성의 도전

  『백경』은 사건이 점화되는 순간부터 서사가 마무리되는 순간까지, 비합리성으로 점철되어있다. 우리의 안정이 얼마나 허무한가. 얼마나 공허하고 불안정한가. 딛고사는 땅마저 판이 움직일 때마다 흔들리고,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돈다. 태양계는 우리 은하에 포함되어있고 그 은하는 오르트 구름에 둘러쌓여 빙빙 돈다. 계속 팽창하는 전 우주적 관점에서 한 인간의 위상은 매 순간 흔들리고 있다. 우리는 태생적으로 불안정한 존재다. 존재를 '안정'이라는 허구속에 넣어 삶을 진행하는 자기기만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제 '데미안'처럼 알을 깨버릴 때가 됐다. 근대적 합리성이 낳은 신화에서 탈출해야 한다.  

  이 책의 주인공 이스마일도 본능적 이끌림에 따라 포경선 피쿼드 호에 승선한다. 그 배의 선장인 에이허브는 '백경'에게 다리를 잃은 후 평생을 복수심과 분노로 살아왔다. 이스마일과 친분을 맺은 퀴퀘그라는 야만인은 아무것도 모르지만, 순수한 영혼을 지녔다. 그 배의 모든 선원들은 선장의 흥분에 덩달아 가슴을 펌프질하며 백경을 잡으려한다. 피쿼드 호는 백경에 대한 증오로 가득하다.

  반면 백경은 무엇인가. 책은 내내 고래에 대해 설명한다. 고래의 생물학적 구조와 그 능력, 그가 저지른 참사를 비롯해 고래를 주제로하는 다양한 설화와 신화까지 소개한다. 책의 내용으로 미루어보아 항해술과 기술이 발전하지 못했던 당시 고래는 선원들에게 돈벌이이자,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고래는 거대하고 막강하다. 그 새총처럼 갈라진 꼬리를 한번휘두르기만 해도 배 옆에 덩그라니 달려있는 보트따위는 두조각 나버리고 만다. 그가 급히 부상하기만해도 노송나무 배 밑편이 갈라지고 부서져 배가 침몰한다. 

  게다가 '백경'은 무엇인가. 고래 중의 고래, 무수한 포경업자들이 두려워하는 대상이자 작살 몇 개를 꽂고도 유유히 헤엄쳐나가는 바다의 수호자다. 그는 이스마일이 서술하듯, 신이 보낸 사자다. 하나님은 백경을 보내서 자신의 위엄을 보이려 한 것이다. 그 주름살진 이마와 하얀 모습은 가히 '신성'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에이허브는 백경이 신의 사자이며 신이 그 위엄을 보이려 백경을 보냈다는 말에 중지를 쳐든다. 그는 담담한 유언과 함께 백경을 좇는다. 분노와 증오에 휩쌓여 인생 전부를 백경을 죽이는 데 집중한 그는 마침내 백경의 등에 작살을 꽂는다. 하지만 그 표피를 뚫고 들어간 작살의 밧줄에 감겨 에이허브도 심연으로 빠져든다. 중요한 건 에이허브가 죽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모두가 백경으로부터 도망치려는 상황에서 에이허브가 '백경을 잡았다!'는 사실이다. 한 인간의 작은 증오와 분노가 신의 사자의 등에 '작살'을 꽂아버렸다. 이 대목에서 근대적 합리성과 '신'에 대한 비합리성의 도전이 성공했다는 느낌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