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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인문학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를 읽고(스포일러 있음)

  누구나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있다. 행복하거나, 끔찍하거나, 그립거나 다양한 이유로 말이다.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는 '당신은 그토록 원하던 순간으로 돌아간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라는 질문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벅참이 밀려와 말을 잇지못하고 그 시간을 흘려보낼 수도 있고, 용기를 내 무언가를 바꿔볼 수도 있다. 그저 바라볼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행동이 현재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즉, 과거를 바꾸면 현재도 뒤바뀐다. 이게 서사의 긴장감을 유지시킨다. 소설 속 '현재 엘리엇'은 일리나를 몹시 사랑했다. 하지만 그녀는 30년 전, 기르던 범고래에게 공격을 당해 사망했다. 그녀는 이미 이승에 없었고 엘리엇에게 허락된 건 그저 낡은 그리움이었다. 그런 그는 캄보디아의 노인에게서 '과거로 돌아가는' 약을 받았고, 속는 셈치고 그 약을 먹었다. 환상적이게도 과거로 돌아간다. 30년전 자신과 만난 엘리엇은 그토록 보고싶던 일리나를 먼발치서 바라본다. 이 때 나는 '어서 일리나에게 달려가서 범고래에게 그녀가 공격당한다고 말해야지 뭐하는거야!'라 속으로 외쳤다. 천불이 나더라 그런데 '30년 전 엘리엇'도 같은 마음이었나보다. 이상한 태도를 취하는 '현재 엘리엇'을 추궁해 일리나가 곧 죽는다는 사실과 그 책임이 엘리엇 자신에게 있다는 걸 알게됐다. 이를 들은 엘리엇은 어떻게든 진실을 알려했고 '현재 엘리엇'을 여러 방법으로 협박해서 전모를 알게된다. 일리나를 살리려는 '30년 전 엘리엇'을, 현재의 엘리엇은 기필코 막으려 한다. 

  일리나를 살리면 '현재 엘리엇'은 자신의 딸 앤지와 만날 수 없다. 앤지는 '30년 전 엘리엇'과 '30년 전 일리나'가 헤어져야만 태어날 수 있었다. 결국 30년전 엘리엇과 현재의 엘리엇은 다투게된다. 딸과 사랑하는 애인,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하는 상황이었다. 특히 이미 한 차례 일리나를 잃는 경험을 한 '현재 엘리엇'이 딸마저 잃어야 한다면 너무 큰 비극이라 느껴졌다. 

  이들이 다투는 근본 원인은 과거와 현재가 이어져있다는 데에 있었다. 내가 과거에 대한 관망자가 아니라 참여자가 되는 순간 현재는 바뀐다. 커다란 바위가 물줄기를 바꾸듯이 말이다. (신이 조금만 자애로웠다면 얼마나 좋을까)


개인적으로 이 소설은 '현재의 소중함'을 말하려한다고 느꼈다. '30년 전 엘리엇'은 일리나를 사랑하고 있다. 현재 그의 마음에는 일리나가 가득차있다. 반대로 '현재 엘리엇'은 딸을 무척이나 아끼고 사랑하고 있다, 딸 앤지가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다고 말할만큼. 과거와 미래가 다툰 까닭은 '현재'를 지키기 위해서다. '현재'는 늘 우리의 전부다. 유예되지 않는다. 그래서 행복은 여러의미로 치명적이다. 상실감은 빛보다 빠르고, 강렬하고, 날카롭다. '30년 전 엘리엇'은 결국 일리나를 살리고 이별을 택하면서 폐인으로 전락했다. 풍선에서 바람빠지듯, '현재'에서 행복을 빼버린 그는 바닥으로 떨어져 절친한 매트와 삶 모두를 잃고 만다. 우리의 모든 행동은 행복의 길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삶도, 결과를 향한 인내도 모두 행복으로의 길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현재는 유예되지 않는다. 누구 말마따나 과거는 흘러갔고, 미래는 오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이 소설은 우리나라에서 동명의 영화로 소개된 바 있다. 책을 읽는 내내 김윤석씨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의 작품을 소설화하기 꺼리던 기욤 뮈소가 김윤석씨를 보고 마음을 돌렸다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엘리엇을 읽으면서 김윤석씨 눈빛이 떠올랐다. 특히 30년전 일리나에 대한 현재 엘리엇의 복잡한 감정이 그 눈빛하나에 담겼다는 게 새삼스럽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