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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

『옥자』를 봤다. 『옥자』후기(스포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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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은 영화를 잘 만든다. 『설국열차』처럼 어쩌면 뻔할 지도 모를 주제를 흥미롭게 전개시킨다. 이번에도 이를 느꼈다. '이익을 위해 생명을 착취하는 인간의 이기심', '유전자 조작', '동물 착취', '비윤리적 행태' 등등... 여러가지 무거운 요소들을 이렇게 유쾌하게 그려내다니! 그와 동시에 여러가지 생각할 거리가 떠올랐다.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생명'은 무엇인가. 복잡한 기관을 가지고 호흡하며, 세포분열하고 에너지를 전환하는 모든 유기체를 말하는걸까? 단지 이게 생명을 정의하는 모든 요소라고 보기에는 마음이 편치가 않다. 우리는 자갈치와 돼지를 동일하게 취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심약한 사람 100명에게 자갈치의 목을 자르는 것과 돼지를 도살하는 것, 둘 중 적어도 한 장면을 봐야한다고 요청한다면 그 집단의 경향성이 어디로 향할지는 명확해보인다. 우리는 '모두 같은 생명'이라 말하면서 동시에 '모두 다른 생명'으로 취급하는 모순을 저지르고 있다. 그렇기에 채식주의자가 있고, 다른 포유류를 웃으며 먹을 수 있는 거겠지


그 연장선에서, 유전자 조작으로 슈퍼돼지를 만들고 도살하는 미란다 Corp.를 욕하기가 쉽지 않다. 미란다 Corp.는 현실 속 우리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번화가에 가면 문전성시를 이루는 고깃집이 이를 증명한다. 그 고기가 밭에서 난다고 믿는 사람은 없을테니 모두가 '내가 먹고 있는건 도살당한 돼지'라는 걸 알고 먹는 셈이다. 존엄한 인류는 다른 포유류의 시체를 태워먹으면서 하하호호 웃을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 많은 동물들이 식용을 목적으로 죽어간다. 그들의 죽음은 애초에 존엄할 수 없다. 수많은 부수 조치가 죽음으로 향하는 고통은 경감시키지만 죽음의 속성은 여전히 공허하다. 태초에 누군가의 목구멍을 만족시킬 목적으로 탄생한 녀석들의 죽음이 존엄할 수가 있겠는가. 그들은 작은 케이지 속에서 짧은 평생을 살다가 전기 충격으로 기절한 채 도살되는 순간에 비로소 가치있다. 이미 동물은 우리의 주요 식재료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영화 속 미란다 Corp.의 정당화 논리도 이런거였다. 


'지금 굶어죽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우리가 개량한 슈퍼돼지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우리는 이를 비난할 수 있을까? 육식에 대한 경각심은 가질 수 있겠지만, 저런 의도자체를 비난할 자격이 우리에게 있는지는 의아하다. 많은 사람들이 육식을 하고, 그 붉은 식사 시간은 식용 동물의 죽음을 거드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만약 영화를 보면서 미란다 Corp.를 핏대올리며 비난한다면, 통렬한 자기반성을 하는 분이므로 박수를 받아야 한다. 고기를 맛나게 먹으면서 육류업만 비난하는 건 본인의 죄책감을 피하려는 비겁한 행동으로 보인다.


영화 속에서는 슈퍼돼지 '옥자'의 목숨값으로 황금으로 된 돼지를 받는다. 미자(옥자의 친구이자 영화 주인공인 소녀)의 할아버지는 이를 수긍하고 옥자를 떠나보내자고 한다. 이른바 '목숨값'이다. 영화 내내 비추어지는 옥자의 '인간같은 눈'은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 같다. '생명은 가격으로 치환가능한가?' 옥자의 맑은 눈이 스크린에 뜰 때마다 마음이 불편했던 까닭이다.


나는 내일도 고기를 먹을 것 같다... 분명 생명은 가격으로 치환불가능한데, 내일 내가 갈 고깃집 벽면에는 1인분 얼마라 적힌 메뉴판이 붙어있을거다... 영화 속에서는 어린 미자의 무모함이 세상을 뒤바꾸어놓는다. 현실에서는 미자가 나올 수 있을지...